ページの先頭です。 メニューを飛ばして本文へ
현재 위치 Home > 한글 > 히로시마시의 역사

本文

히로시마시의 역사

기사 ID:0000012729 印刷ページ表示

원시·고대

현재 시가지가 있는 오타가와 강 하류 유역은 대부분이 바닷속에 있고 우시다·야노·이쓰카이치와 히로시마만에 떠있는 섬이었던 히지야마 산에 조몬시대의 유적이 또한, 중소 하천에 의한 충적지를 내려다보는 구릉을 중심으로 시내 각 지역에 야요이시대의 유적이 있습니다.

고훈시대 전기가 되면 구치다의 나카오다 고분군, 미도리이의 우나키야마 고분군, 진구야마 고분군 등 오타가와 강 유역에 대형 고분이 축조되고 후기에는 가베와 시라키 등의 내륙 지역에서도 고분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율령제도하의 지방 정치는 고쿠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키국에서는 사이조(히가시히로시마시) 또는 후추(아키군 후추초)에 고쿠후가 설치되고 헤이안시대 중기에는 이미 후추에 있었다고 합니다. 시라키의 미타고 등은 고쿠후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율령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귀족·절과 신사나 황실은 장원을 소유하게 되어 8세기 말에는 우시다쇼가 야마토국의 사이다이지 절의 영토가 된 외에 가베쇼(가베), 미이리쇼(미이리), 다토쇼(구치타 주변) 등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의 오타가와 강 하구 부근에 있었던 기온 지역의 야마모토 주변에는 내륙부에 있던 이쓰쿠시마 신사의 장원에서의 물자를 반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아두는 구라시키지가 있었습니다.

중세

조큐의 난(1221년) 후 새로 아키국 슈고직(지방을 통솔하는 행정관의 관직)이 된 다케다 씨는 다케다야마 산에 축조한 가나야마성(아사미나미구)에 본거지를 두었습니다.
성 아래 부근에는 시장이 서는 등 활기를 띠게되고 정치의 중심도 후추에서 옮겨왔습니다. 다케다 씨는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권유에 응해 모리·요시카와·구마가이 씨 등을 아군으로 삼아 야노성(아키구) 등에서 반막부 세력과 격렬한 항쟁을 계속했습니다.
그후 다케다 씨는 슈고직에서 쫓겨나지만 15세기 초에는 오타가와 강 유역을 지배하는 분군슈고로 다시 복직했습니다.
이 무렵 현재의 시가지 부근에는 오타가와 강에 의해 옮겨진 토사가 퇴적하여 사주나 자연제방이 생기고 차츰 삼각주가 형성되어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이 지역은 히로시마 만의 주변에서 다케다 씨와 야마구치 지역의 오우치 씨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게 되는 등 차츰 정치적·경제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이 문서에 처음 나오는 것은 1937년의 일로 이쓰쿠시마 신사 영역의 아마노쇼(야노 주변)의 부속 땅으로서 5개의 포구의 명칭이 적혀 있습니다.
1541년 다케다 씨는 멸망하고 대신하여 모리 씨가 점차 세력을 넓혀 1555년의 이쓰쿠시마 합전에서 스에 씨를 격파하고 급속도로 세력을 주고쿠지방으로 확대했습니다. 모리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과정에서 그 세력 아래 들어가 주고쿠지방의 대부분을 영유하는 122만석의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이 광대한 영지 경영의 중심은 모리 씨 본거지인 요시다의 고리야마성(아키타카타시)이었지만 군사·정치·경제 등의 모든 면에서 해륙교통의 요충지로 본거지를 옮겨야 했습니다.

근세

1589년 모리 데루모토는 당시 5개(5개 촌락)라고 일컬어진 오타가와 강 삼각주 위에 축성을 시작하고 이 지역을 ‘히로시마’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약 2년간의 시간을 들여 축성 공사는 완성되고 1591년 데루모토는 가신을 거느리고 입성함과 동시에 영내 각지에서 장인이나 상인을 불러들여 교토·오사카를 모방하여 조카마치를 건설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모리 데루토모는 스오·나가토 2개국에 옮겨지고 대신하여 오와리 기요스(아이치현)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아키·빈고 49만 8천석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후쿠시마 씨는 모리시대를 이어 조카마치를 확장하고 정비함과 동시에 사이고쿠 가도(산요도)를 성 아래로 통과시켜 이즈모·이와미 국으로의 운세키 가도의 정비를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후쿠시마 씨는 바쿠후로부터 히로시마성의 무단 수축의 죄로 면직되고 1619년 기슈(와카야마현)에서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아키 1국과 빈고 8군 42만 6천석을 영유하고 입성했습니다.
에도시대에는 히로시마 성 아래 남쪽 간석지가 차례로 간척되어 1820년 무렵에는 새롭게 생긴 마을 수는 35개를 꼽았습니다.
이 무렵 마을과 새로 생긴 마을의 인구는 4만 8천명을 넘고 이 인구에 무가·절과 신사의 추정 인구 2만명을 더하면 성 아래 마을의 총인구는 7만 명 전후로 되어 에도·오사카·교토·나고야·가나자와의 뒤를 잇는 대도시였습니다.
또한, 내해 항로 연변의 최대 도시로서 혼카와 강이나 모토야스가와  강 연변은 타국 선박으로 활기를 띠고 그 중에서도 나카지마 부근은 가도 연변에 큰 가게가 늘어선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성 아래 마을 근교에서는 연안 지역에서 면이 오타가와 강 유역에서는 삼실·종이·죽세공·야채, 히로시마만에서는 김·굴 등이 생산되어 대부분이 성 아래 마을에 모아진 후 간사이 지방으로 출하되었습니다.

성 아래 마을 평면도 1778~1779(안에이 7~8)년 무렵の画像

성 아래 마을 그림 지도(1778∼1779년)

메이지·다이쇼·쇼와(전쟁 전)

1871년 7월 새정부에 의한 폐번치현이 행하여져 이듬해 1872년 4월, 히로시마 성아래 마을은 히로시마현 제1대구가 되고 이어서 1878년 11월, 군구정촌편제법의 실시로 히로시마구로 개편되었습니다.
이어서 1888년 4월, 시제정촌제가 공포되고 이듬해 1889년 4월 1일, 히로시마는 전국에서 최초의 시의 하나로서 시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때의 면적은 약 27㎢, 가구수는 2만 3,824 가구, 인구는 8만 3,387 명이었습니다.
1889년 11월에는 센다 사다아키 현령(현지사)의 노력으로 1884년 9월 이래 5년 동안에 걸친 축항 공사가 완성되고 미나미신카이에서 남쪽으로 우지나지마 섬에 이르는 얕은 바다는 광대한 육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1894년 6월에는 산요 철도가 히로시마까지 개통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에 청일 전쟁이 시작되자 히로시마·우지나 사이의 군용철도(우지나선)가 2주일 남짓의 돌관공사로 개통하고 우지나항으로부터 많은 병사·물자가 전쟁터로 보내졌습니다. 9월에는 대본영이 히로시마 성내에 옮겨져 10월에는 임시제국의회도 열렸습니다.
이후 1904·1905년 러일전쟁 등 잇따른 전쟁으로 군 관계의 제반 시설이 차례로 설치되고 본시는 ‘군도’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갔습니다. 한편 1902년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의 설치를 시작으로 히로시마 고등공업학교, 히로시마 고등학교, 히로시마 여자전문학교, 히로시마 문리과대학 등의 학교가 설치되어 문교 시설이 충실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본시는 차츰 주고쿠지방에서 정치·경제·문교·교통의 중심 도시로 되어 갔습니다.
군사시설 설치 등으로 상수도의 부설 등 도시 기반도 정비되어 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 둘레 해자를 매립한 일부에 전차 궤도가 부설되는 등 거리 경관은 크게 바뀌어 갔습니다.
1912년 11월 히로시마전기궤도주식회사 경영의 시내 전차가 히로시마역-가미야초-아이오이바시선 등 3노선에서 개통하여 종래의 승합마차 대신으로 시내의 주요 교통기관이 되었습니다.
1915년 4월에는 미유키바시-우지나선, 1917년 11월에 사칸초-요코가와선이 개통되면서 시내 교통은 한층 더 편리해지고 핫초보리·가미야초 부근이 조카마치시대부터 경제적 중추였던 나카지마혼마치·사카이마치 부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1921년 신텐치가 창설되어 활동사진관 등을 중심으로 각종 가게가 모이는 새로운 번화가가 탄생하고 1929년에는 히로시마 최초의 백화점 후쿠야가 핫초보리에 개업했습니다. 이렇게 본시의 중심적인 번화가는 핫초보리 부근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나카지마와 신텐치를 잇는 혼도리도 차츰 번화가로 발전해 갔습니다.
또한, 1904년 9월에 니호지마무라 아자 우지나지마를 시 구역에 편입(새로운 마을명:모토우지나마치) 더 나아가 본시가 1919년에 제정된 도시계획법의 적용을 받음으로써 쇼와시대에 들어서서 본시와 더불어 도시계획 구역으로 된 인접 정과 초에 합병을 제의하여 1929년 4월 인접 7개의 정과 촌(니호무라·야가무라·우시타무라·미사사초·고이초·후루타무라·구사쓰초)과의 합병이 실현되었습니다. 이 합병으로 인구는 27만명을 넘어 전국에서 7번째 인구가 많은 도시로 되었습니다.
근세 이래 새로운 마을 개발로 인해 하구 쪽으로 발달해 온 삼각주 지대의 숙명으로써 본시는 오랫동안 홍수, 풍해일 피해에 시달려왔습니다. 1932년에는 오타가와 강 개수 공사가 착수되고 또한, 우지나항은 히로시마항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듬해 1933년에는 수축이 시작되어 1940년부터는 공업항 건설과 매립지를 임해공업지대로 하는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내 전차 개통을 축하하는 꽃 장식 전차(1912(다이쇼 원년)년)の画像

1984년 히로시마시에서 개최된 임시제국의회의 임시 의사당

現原爆ドーム

피폭 전의 아이오이바시 다리와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현 원폭 돔)

쇼와시대(전쟁 후)·헤이세이시대

1945년 8월 6일 인류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시 중심부 상공 약 600m에서 작렬했습니다. 히로시마의 거리는 한순간에 초토화되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빼앗기고 모든 도시 기능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해 말까지 사망자는 약 14만명(오차 ±1만명)으로 추계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후장애에 시달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괴멸하고 폐허가 된 본시의 부흥은 철도·전차 등의 수송기관과 통신·전력 등의 복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도 식량이나 물자의 결핍에 시달리면서도 생활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편 시는 1946년 가을에는 부흥도시계획을 결정했지만 자금난 등으로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이 1949년 8월 6일에 공포된 ‘히로시마 평화기념 도시건설법’이었습니다. 이 법으로 도로·교량·주택 등의 정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고 고도경제성장 전야의 시역 확장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피폭부터 2년 후인 1947년 8월 6일에는 평화제전이 거행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제4회 평화제전은 개최 직전에 치안을 이유로 중지되었지만 이듬해 1951년부터는 ‘원폭사몰자 위령식 및 평화기념식’으로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55년에는 평화기념공원 내에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이 개관되고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도 개최되어 명실공이 평화기념도시로서 실질적인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피폭의 참상을 남기는 원폭 돔은 전쟁이 끝난 후 잠시동안 그 존폐가 논의되었지만 1960년부터 활발해진 시민의 보존운동으로 1966년에 보존이 결정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시정촌이 소관하는 사무가 늘어남에 따라 그 사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자치체 규모의 합리화가 필요해져 1953년 정촌합병촉진법, 1956년에는 신시정촌 건설촉진법에 의해 정과 촌의 합병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히로시마시에서는 1955년 4월 아키군 헤사카무라, 1956년 4월 아키군 나카야마무라, 같은 해 11월에는 사에키군 이노쿠치무라와 합병하여 이듬해 1957년에는 인구가 40만명을 넘었습니다. 이 가운데 시는 1958년 ‘대히로시마’ 구상을 발표하고 본시를 중핵으로 광역도시권을 건설하려는 구상을 잇따라 내세웠습니다.
시내 중심부의 전쟁 피해 부흥은 새로운 공원이나 강기슭 녹지, 헤이와오도리 등 넓은 도로를 정비하는 부흥 계획으로 대규모 구획 정리가 필요해져 1972년의 완성까지 약  30년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도시 유입 인구의 증가와 구획정리사업 등의 영향으로 강기슭 지대는 판잣집 등의 대규모 불법 건축으로 점거되고 특히 모토마치 지역은 대규모 불법 건축군, 소위 ‘원폭 빈민가’의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1978년 이러한 빈민가를 철거하고 고층 주택이나 공원을 정비하는 모토마치 지역 재개발사업이 완료하고 전쟁 피해 부흥에 일획을 그었습니다. 한편 원폭 피재의 영향이 적었던 단바라 지역에 대해서는 폭이 좁은 세가로 등이 큰 과제로 남아있었지만 2014년에 43년에 걸친 재개발 사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일시 중단되었던 오타가와 강 개수 공사는 1951년에 재개하고 1965년 신방수로에 물이 통하게 되어 완료되었습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큰 과제였던 오타가와 강 유역의 수해가 크게 줄었습니다.
고도성장기에 들어서서 1961년에 히로시마공항(현 히로시마 헬리포트)이 개항하고 1964년 산요 본선 전선전화개통, 1965년 히로시마민슈역 완성, 1966년 국도 2호 신히로시마바이패스 개통 등 교통기반의 정비가 추진되어 시세가 한층 더 신장, 히로시마 도시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 영역을 넘어 넓혀진 일상생활권 내의 여러 문제를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주변 정촌과의 합병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1968년 1월, 주변 19 정촌에 위한 히로시마지구 광역행정간담회가 설치되고 1970년 3월, 매력 넘치는 광역생활권 형성을 내건 히로시마시 기본구상정책으로 주변 정촌과의 합병이 단번에 진행되었습니다.

1971년  4월의 아사군 누마타초와의 합병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아사군 아사초, 1972년 4월 아사군 가베초, 같은 해 8월 아사군 기온초, 1973년 3월 아사군 야스후루이치초,  사토초, 고요초, 아키군 세노가와초, 같은 해 10월 다카타군 시라키초, 1974년 11월 아키군 구마노아토무라, 아키초, 1975년 3월 아키군 야노초, 후나코시초의 총 13개의 정촌이 본시와 합병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4월 1일에는 전국에서 10번째의 정령지정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현 관할의 사무와 권한이 시로 이양되어 행정 운영의 원활화, 새로운 재원 확보에 따른 각종 도시 시설의 정비 촉진 등의 시민 서비스 향상, 행정구제의 도입에 의한 시민과 행정의 연계 강화가 도모되었습니다.

1985년 3월 사에키군 이쓰카이치초와 합병, 인구는 100만 명을 넘었습니다. 2005년 4월에는 사에키군 유키초와 합병하여 현재 인구 119만 명을 넘는 도시로 되었습니다.
정령지정도시 이행 후 광역생활권의 주민에게 제공하는 스포츠센터, 도서관, 문화센터가 각 구에 차례로 정비되고 또한, 향토자료관, 현대미술관, 아스텔프라자, 육상경기장(빅 아치), 국제회의장 등의 주고쿠, 시코쿠 지방의 중심도시로서의 광역적인 문화·스포츠 시설이 갖춰져 갔습니다.
그중에서도 국제대회에 사용할 수 있는 스포츠 시설을 갖춘 광역 공원에서는 이곳을 중심으로 1994년에 지방도시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대면하는 구릉지에 히로시마시립대학이 창립되고 주변 지역의 개발도 가속화되었습니다.
1982년에는 대규모 도매단지와 주택단지의 조성을 동시에 하는 서부개발사업이 준공, 아시아경기대회 전후에는 세이후신토의 개발, 2001년 가미야초 지하 상가 ‘샤레오’ 개업 등 새로운 시가지의 개발이 진행되었습니다.
1975년 산요신칸센의 전선 개통, 1979년 히로시마공항(현재 히로시마 헬리포트)으로의 제트기 노선 개설 등의 사회 자본의 정비와 더불어 본시의 경제도 순조롭게 성장했습니다.

1994년에는 시 북부에서의 만성적 교통정체를 해소하기 위하여 기온신도와 더불어 신교통시스템(아스트램라인)이 개통하고 2015년에는 JR 산요 본선과의 교차 부분에 신하쿠시마역이 생겨 한층 더 대중교통망이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2001년에는 히로시마 고속 4호선(히로시마 세이후신토선)이 개통되고 그후 1호선, 2호선, 3호선이 개통하여 본격적인 도시고속도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도성장기가 지나도 전쟁이 끝난 후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 남아있던 히로시마역 주변 지역에서는 히로시마의 현관으로서 어울리는 모습으로 정비하기 위해 1981년 히로시마역 남쪽 출구 A 제1종 시가지 재개발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1999년에 사업을 완료했습니다.

역 주변 정비는 2009년 3월의 히로시마시민구장(마쓰다 스타지움)의 완성을 계기로 단번에 가속화되고 2017년에 인접한 B 블록, C 블록의 재개발이 완료되어 새로운 활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 북쪽의 후타바노사토 지역에 대해서도 재개발에 의한 새로운 도시 조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시가지가 정비되어 피폭 건조물이 해체되어 가는 가운데 피폭의 증인으로서 남겨진 원폭 돔은 1996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2002년에는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몰자추도 평화기념관이 설치되어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과 더불어 피폭자의 유품이나 체험기 등을 통해 원폭의 비참함과 평화의 귀중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핵병기 철폐와 세계항구 평화의 실현을 호소해 온 히로시마는 국내외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아 세계 각국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016년 4월, G7 히로시마 외상회합의 개최, 5월의 오바마 미국 대통령(당시)의 히로시마 방문이 세계의 주목을 모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 있는 일이며 핵병기 철폐를 위한 역사적인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平和記念資料館

완성을 기다리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1954년)

アジア競技大会開会式

아시아경기대회 개회식(1994년)

マツダスタジアム

새로운 시민구장(마쓰다 스타지움)이 완성(2009년)

オバマ米国大統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2016년)

 

자료:공문서관

이 페이지에 관한 문의처

기획총무국 기획조정부 정책기획과 통계분석계
전화:082-504-2012/Fax:082-504-2029
메일 주소:seisakukikaku@city.hiroshima.lg.jp


災害情報

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症に関する情報

コロナやさしい日本語

링크에 관한 주의사항

이 페이지의 링크 일부는 일본어 Web 사이트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外国人市民のための生活ガイドブック

韓国語のバナーの画像<外部リンク>

市民と市政<外部リンク>

ひろしま公式観光サイト<外部リンク>

  • Hiroshima Peaceのバナー画像<外部リンク>
  • ザ・ひろしまブランド(英語版)
  • 広島市へ寄付